동예에 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1.단궁과 과하마 등이 특산물이었다
2.주요 관명으로 마가/우가 등이 있었다
3.흉년이 들면 왕에게 책임을 묻기도 했다
4.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맞는 풍습이 있었다
이 문제는 동예의 경제적 특성과 특산물에 대한 문제이다
*1번에서는 동예의 경제와 특산물에 대해서 얘기 하려고 합니다
2번3번은 부여의 풍습이다
부여는 이미 1세기 초에 왕호를 사용하였고 중국과 외교 관계를 맺는 등 발전된 국가의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북쪽으로는 선비족 남쪽으로는 고구려와 접하고 있다가
3세기 말 선비족의 침략을 받아 크게 쇠퇴하였고 결국은 고구려에 편입되었다(494).
그러나 왕이 나온 대표 부족의 세력은 매우 강해서 궁궐 성책 감옥,창고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었으며
왕이 죽으면 많은 사람들을 껴묻거리와 함께 묻는 순장의 풍습이 있었다.
부여의 풍속에는 영고라는 제천 행사가 있었다.
이것은 농경 사회의 전통을 보여 주는 것으로 12월에 열렸다.
이 때에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가무를 즐기며 죄수를 풀어 주기도 하였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에는 제천 의식을 행하고
소를 죽여 그 굽으로 길흉을 보는 점복을 하기도 하였다.
부여는 연맹 왕국의 단계에서 멸망하였지만 우리 역사에서 차지하는 의미는 매우 크다.
그 이유는 고구려나 백제의 건국 세력이 부여의 한 계통임을 자처하였고
또 이들의 건국 신화도 같은 원형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여의 법으로는 4조목이 전해지고 있다.
그 내용은 살인자는 사형에 처하고 그 가족은 노비로 하며
남의 물건을 훔쳤을 때에는 물건값의 12배를 배상하게 하고
간음한 자와 투기가 심한 부인은 사형에 처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결국 고조선의 8조의 법과 같은 종류임을 알 수 있다.
부여에는 왕 아래에 가축의 이름을 딴 마가/ 우가/ 저가/구가와 대사자/사자 등의 관리가 있었다.
이들 가(加)는 따로이 행정 구획인 사출도(四出道)를 다스리고 있어서
왕이 직접 통치하는 중앙과 합쳐 5부를 이루었다.
가들은 왕을 추대하기도 하였고 수해나 한해를 입어 오곡이 잘 익지 않으면
왕에게 그 책임을 묻기도 하였다.
부여는 만주 송화강 유역의 평야 지대를 중심으로 성장하였다.
농경과 목축을 주로 하였고 특산물로는 말 주옥 모피 등이 유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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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충남 부여군(백제 유적지)는 고대 부여(夫餘)국과 지리·역사적으로 다릅니다.
충남 부여는 백제가 웅진(공주)에서 사비(부여)로 천도한 후의 수도.
즉 충남 부여는 백제의 사비도읍 시기 수도일 뿐 ‘부여국’과는 무관해요.
시험에 자주 나오는 오답 유도 포인트
‘부여’라는 이름 때문에 충남 부여로 착각하는 문제 자주 출제!
고대 부여 = 만주 송화강 유역
충남 부여 = 백제 후기의 수도 (사비도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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